[백]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토요일
입당송
갈라 4,4-5 참조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삼으셨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외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새로운 빛을 비추시고 동정녀 몸에서 저희와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셨으니 저희도 그 은총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3,7-10
7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이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사람입니다.
8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9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10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이렇게 뚜렷이 드러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8(97),1.7-8.9(◎ 3ㄷㄹ)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 소리쳐라, 바다와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강들은 손뼉 치고, 산들도 함께 환호하여라. ◎
○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 그분은 누리를 의롭게, 백성들을 올바르게 다스리신다. ◎
복음 환호송
히브 1,1-2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이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네.
◎ 알렐루야.
복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5-42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 묵상
오늘의 복음 말씀은 임의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요한의 제자였던 두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서 새로운 이름을 불러 주시는 장면입니다.
첫 번째 장면에서는 그 두 제자에게 다른 큰 말씀 없이 하루를 함께 묵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그대로 시간을 함께 보내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장면은 베드로에게 이름을 불러 주시고 또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시기도 하는 장면입니다.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 그리고 이름을 불러 주는 것. 이 두 가지 모습은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가장 흔하고 일상적인 일들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단순하고 일상적인 행위가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존재를 내 머릿속에 기억하고 담고 있겠다는 뜻이 되고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은 그 존재를 위해 나의 일부를 기꺼이 내어 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을 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서로를 향한 사랑과 친교를 위해서는 거창한 무언가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또 시간을 함께 보내는 흔한 일상의 모습들 속에도 진실된 사랑을 담고 또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예물 기도
하느님, 저희에게 참된 믿음과 평화를 주셨으니 저희가 예물을 바쳐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합당히 공경하고 거룩한 제사에 참여하여 온 마음으로 이 신비와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 성탄 감사송 1 : 빛이신 그리스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로 저희 마음의 눈을 새롭게 밝혀 주시어 하느님을 눈으로 뵙고 알아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16 참조
주님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주님의 백성을 온갖 은혜로 다스리시니 오늘도 내일도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덧없는 현세에서도 위안을 받고 영원한 세상을 향하여 더욱 힘차게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요한 복음서는 “무엇을 찾느냐?”(1,38)라는 물음으로 시작해서 “누구를 찾느냐?”(20,15)라는 물음으로 마무리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자신을 뒤따라오는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던지신 물음은 “무엇을 찾느냐?”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던지신 물음이 바로 “누구를 찾느냐?”라는 것이었지요. 결국 신앙의 여정은 ‘무엇’을 찾는 것에서 시작하여 인격적인 사랑의 동반자인 ‘누구’를 만나서 그 사랑을 키워 가는 것이라는 말이겠습니다.
묵주 기도를 바치며 환희의 신비 5단 “마리아께서 잃으셨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심”을 묵상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대개 이 신비를 묵상하노라면 아들을 잃고 애태웠을 부모의 심경과, 마침내 아드님을 찾아내시고는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하시는 성모님의 원망 섞인 말씀, 그리고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2,49) 하시는 아들 예수님의 조금은 배짱 좋은 대답만 떠오르지요. 그리고 순명하시는 예수님과,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에 마음이 많이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초점을 비껴간 묵상이라는 것을 어느 때부터인가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환희의 신비 5단입니다. ‘환희’란 터져 나오는 기쁨입니다. 자신들의 아들이면서도 하느님이신 그분을 잃었다가 가까스로 되찾은 부모의 감격과 탄성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요?
우리 마음의 그물이 촘촘하지 못한 탓인지 우리는 삶에서 예수님을 쉽게 놓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놓쳐 버린 예수님을 다시, 거듭거듭, 새롭게 되찾고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동희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