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빛〉 2월호 : 식물학자 에밀 타케 신부 _ 가보고 싶었습니다
이윤일 요한 순교 성인 기념 미사 및 선교사제 파견식
대구대교구 신청사 층별 안내
교구청 신청사 세례자 요한 경당 축복식
2025년 정기희년 폐막미사
2026 대구대교구 사제, 부제 서품식
1월 세계청년대회 월간 캠페인
2026 대구대교구 새 사제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마냥 좋으신 분은 아니셨다. 적어도 어린 시절부터 그분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나자렛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반갑기보다 못마땅한 존재였다. ‘못마땅하다’고 번역된 그리스말 동사 ‘스칸달리조’는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을 넘어, ‘돌에 걸려 넘어지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니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무엇에 걸려 넘어졌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익숙하다고 믿어 온 대상이 갑자기 낯설어질 때, 인간은 그 낯선 것에 질문하기 보다 흔들리는 자신의 판단 기준에 더 집착하기 마련이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상식’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상식이란 대체로 많은 사람이 수긍하는 판단을 가리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정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 시대의 상식은 이랬다. 나자렛 같은 시골에서는 위대한 예언자나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는 것.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이웃인지 훤히 아는 사람은, 우리가 허용한 만큼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무언의 규칙이었다. 그 선을 넘어설 때 사람들은 감탄보다 당혹을 느끼고, 그 당혹은 이내 질투 섞인 거부로 바뀐다. 가장 잘 안다고 여기는 대상에게 우리가 가장 손쉬운 판단을 내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익숙함은 이해로 가장하지만, 때로는 가능성을 가두는 옹졸함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에 대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