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대림 제3주간 월요일
복음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23-27
23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24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26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27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 묵상
“모르겠소.”라는 수석 사제들의 답변에서 알고 모름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저 말은 식별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처세술의 문제고, 눈앞에 닥친 불리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방패막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 질문이 요한의 세례와 회개에 관한 것이라면, 사실 이는 유다 사회의 제관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도 중요한 주제다. 하지만 수석 사제들은 개의치 않는다. 이미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체계를 유지하는 것, 그것 하나이기 때문이다. 내게 익숙하고 옳은 것들만을 보고, 정형화된 말들로만 생각하고 소통할 때 사람의 시야는 얼마나 좁아지던가.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보면, “모르겠소”의 처세술에서 우리 또한 마냥 안전한 것은 아니다. 복잡한 것들, 골치 아픈 주제들 앞에서 “모르는 일”이라며 일관하면 ‘고상한’ 사람일 수는 있지만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될 수 없다. 공동체의 허점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돌린다면, 성가신 일에 휘말리지 않는 ‘깨끗한’ 사람일지언정 함께하는 사람일 수는 없다. 하지만 기억하자. 우리 신앙인은 고상하고 깨끗한 이들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서라면 여기저기 다니면서 흙먼지를 뒤집어 쓸 수 있는 이들임을. 그 사실을 알고 내 옆의 아픈 이를 위해 손을 뻗을 준비 정도는 되어야, 주님께서 지니신 권한이 무엇인지 들어 이해할 정도가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