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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생활

Catholic Life

매일 복음묵상
[백]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복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31-35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지혜 7,7-10.15-16)와 복음(마태 23,8-12)을 봉독할 수 있다.>
  복음 묵상
예수님 시대에도 어떤 사람인가 보다는 누구의 자식이고 어느 가문 출신인지가 훨씬 더 중요했나 봅니다. 학벌, 재력, 가문을 따지는 건 오늘날도 마찬가지죠.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이, 특히 가장 가까운 가족을 바라보는 마음에 나의 이기심과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 나라에 큰 벽이 되겠죠. 예수님은 피로 맺어진 가족마저 멀리하며 그 벽을 자신부터 깨트리셨습니다. 요즘은 가족이라고 하면 부모님과 아이 하나 혹은 둘 뿐이며 그나마도 서로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하는 경우도 잘 없습니다. 아이들은 학교 공부에 찌들고, 부모님들은 직장 일에 치이다 보니 가족이지만 집안에서 얼굴보기 힘듭니다. 그렇지만 가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아니 가족이 함께 살고 있는 집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예전이나 별반 차이가 없죠. 내가 어디론가 떠난다 할지라도 결국은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 그곳에는 나를 반겨줄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마음에 위안을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족의 의미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함께하는 사람은 가족이지만, 나를 낳은 어머니, 피를 나눈 형제라 해도 그 뜻을 같이하지 않는다면 남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나의 이기심과 욕망을 강요하게 될 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가장 먼 사람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