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입당송
시편 30(29),11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구원자 되어 주소서.
본기도
주님, 저희가 시작한 참회의 생활을 인자로이 도와주시어 육신으로 닦는 이 재계를 성실한 마음으로 완수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8,1-9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51(50),3-4.5-6ㄱㄴ.18-19(◎ 19ㄴㄷ)
◎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
○ 제 죄악을 제가 알고 있사오며, 제 잘못이 언제나 제 앞에 있나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앞에서 악한 짓을 하였나이다. ◎
○ 당신은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반기지 않으시리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복음 환호송
아모 5,14 참조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주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 묵상
율법이 명하는 단식은 단 하루 뿐이었습니다. ‘대속죄일(욤키푸르)’에 하는 단식이 의무로 주어진 유일한 단식이었지요.(레위 16,29 참조) 그런데 바리사이와 같이 열심한 사람들에게는 일 년에 한 번 하는 단식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는 단식하고, 그것도 모자란 사람들은 더 자주 단식을 실천했다고 합니다.
단식은 ‘속죄’를 드러내는 방식이었으니, 잦은 단식은 큰 속죄를 드러내는 길이었을까요. 아무튼, 그런 관념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은 한심해 보였겠지요. 유다 사람들에게 단식이 ‘속죄’였다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단식은 슬픔을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다만, 그 수단은 기쁨을 드러내기는 적합하지 않고, 지금 필요한 것이 아닐 뿐이지요.
바리사이와 요한의 제자에게, 신앙은 무엇을 뜻했을까요. 그들의 신앙에는 기쁨을 표현할 만한 것들이 없었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갇혀, 이웃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슬픔을 강요하고 있군요.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은 기쁨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물 기도
주님, 사순 시기의 재계를 지키며 이 제사를 봉헌하오니 저희 마음을 주님의 뜻에 맞게 바꾸어 주시고 극기를 실천하는 꿋꿋한 힘을 저희에게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25(24),4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고 비오니 이 사랑의 영약으로 모든 죄의 상처를 낫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의 기도
<자유로이 바칠 수 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이 백성이 언제나 하느님의 크신 은총에 감사하며 지난 삶을 뉘우치오니 이 세상 순례를 마치고 영원토록 주님을 뵈옵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예수님 시대에 단식은 속죄의 날에 지키도록 정해져 있었는데, 공적으로 집단에서 지키거나 개인이 따로 할 수도 있었습니다. 단식은 의도하지 않게 율법을 지키지 않았거나 어긴 것을 본래대로 회복하는 구실을 하였습니다. 또한 단식은 백성들의 죄에 대하여 속죄하는 행위로 여겨지기도 하였습니다. 후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도 단식을 권고한 기록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도교 문헌인 디다케(「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할 것을 권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단식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시지 않습니다(마태 6,16-18 참조). 다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로, 세례자 요한을 따르던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지금이 회개해야 할 때라고 보았습니다(3,2 참조).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스라엘이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혼인하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때라고 보셨습니다(이사 62,5 참조).
단식의 실천과 관련하여 세례자 요한이 강조한 회개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잔치의 초대는 어느 하나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닙니다.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영적인 삶은 비이성적인(irrational) 것이 아니라 이성에 지배되지 않는(nonrational)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단순히 인간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라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한창현 모세 신부)